2년만에 고국방문한 저는
2주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공항에서 집에 도착했을 때
동생은 나를 안방과 이어진 베란다로 안내했다
아주 단호하게 넌, 여기로 들어가.
베란다 담을 넘어 안방으로 입장하니
안방 문틀에는 비닐을 이미 시공함.
저기들 말여, 오해가 있능가 봉가
나는 절대 걸리지 않았어야
내가 사는 동네는 반년째 락다운이여
니네 3단계 뭔지 알아?
진짜 무섭게 생긴 까만 오빠들도
노란 나를 보면 이렇게 빙 둘러 갔당게
내가 단연코 니들보다 걸릴 확률이 적었다고!
제발 거실만 나가게 해달라 울부짖지만...
내 모친, 동생년 모두 단호, 느네 다 나빠써...
암튼 그래서 갇혀쓰요. 격리 시작...
엄빠가 안방을 내주어서 공간은 넓고 창문 크고 쾌적하다
심심한 엄마는 늙은 육신을 갈아넣어 방을 청소해두었고 ㅋㅋ
이역만리 타국에서 오는 딸을 만나는 기쁨에 아빠는
고장난 화장실도 손보았다
제일 큰 기쁨은,
밥때가 되어 배고파! 배고프다고! 울부짖으면
엄마가 밥을 준다 ㅠㅠ 너무 좋다 ㅠㅠ
소리지르기만 하면 시끄럽다고 밥을 준다 ㅋㅋ
자가격리 2주동안 발생하는 내 쓰레기는
격리하는 공간에 모아두었다가 버려야 해서 (수거해가기도 한다고)
음식물 쓰레기를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
방으로 음식이 건너올 때도, 입에 쏙 넣기만 하면 되는 상태로 온다
육십 넘은 어미가 낼모레 마흔이 목전인 딸년을 위해
무화과 껍질을 다 까서 주었다
나는 너무 신나서 데구르르 구르면서 배 잡고 웃게 된다
밥을 먹을 때는 비닐장벽 앞에 밥상을 놓고
비닐장벽 너머 부엌 식탁에 앉은 엄마와
따로 또 같이 밥을 먹는다
엄마가 자꾸 비닐 너머 밥 먹는 내 사진을 찍는다 ㅋㅋ
곧 카톡이 울려 보면, 나도 입장해 있는 카톡 단체 가족방에
버젓이 내 사진을 올린다 ㅋㅋ
자기가 세팅해놨지만 너무 웃기고 뿌듯한가보다 ㅋㅋ
만국박람회에 인간 전시 당했던
원주민 언니오빠야들이 이런 기분이었능가봉가 싶지만
괜찮아 엄마, 밥이 넘모 마시쨔
밥을 먹고 났더니, 엄마는 심심해져서
비닐장벽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는
순식간에 한 더즌의 사람들의 근황토크...
를 빙자한 모두씹기를 시전한다 ㅋㅋ
엄마가 서서 떠드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구순 우리 외할머니 육십적에랑 너무 똑같은 것
이거...유전자...이 호랑말코쌔끼...
1일차에는 시청과 보건소에서 연락이 왔고
자가격리 관련 패키지들을 수령했고
2일차에 보건소 가서 검사가 예정되어 있다
오예! 외출이야! 하고 오초 정도 신나지만
눈알까지 닿을 거 같다는 왕면봉도 무섭고
보건소까지 왕복 도보 한시간 반...이 제일 두렵다
육십 넘은 엄마가 낼모레 마흔인 딸이 길을 잃을까봐 걱정돼서
2미터 뒤에서 따라오겠다고 한다 ㅋㅋ
엄마가 너무 웃겨서 숨이 찬데, 설마 코로나는 아니겠지
여기까지가 1일차
갑갑해서 미쳐버릴 줄 알았는데,
고작 1일차라 그런가 아직은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 와중에 엄마한테 소리 빽빽 질러대서 엄마가 삐짐 ㅋㅋ
여러분,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싸울 수 있어요
1일차의 가장 큰 위기는
엄마가 거실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던 중에 갑자기
"이건 아무한테도 얘기 안했던 건데요..."하고 목소리를 확 죽이더니
옆방으로 들어가서 문 닫아버림
나 진짜 비닐 찢고 뛰쳐나가서
문에 귀대고 엿듣고 싶어서 미쳐버릴뻔
오늘 했던 가장 진지한 생각은 내일 뭐먹지 메뉴고민이었다
후보에 치킨이랑 족발 있는데...아 세상이 아름답다 ㅋㅋ
갇혀있는 와중에 내일을 기대하고 있다니
아이러니 하기가 참말로...
사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뛰쳐나갈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군만두만 줘서 먹다 질려 뛰쳐나가라고 설계를 했던거다
메뉴를 다양하게 구성했다면 오대수 군말없이 집돌이 됐을 거쟈나
돌이켜보면 바쁘게 사는 대부분은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며 하릴 없이
티비나 보고, 배달음식 시켜먹는 휴식을 늘 원한다.
제가 지금 하는 게 바로 그거에여. "놀(고)먹(고)"
뜻하지 않게 요양을 하게 되었네요 껄껄
1일차 식사1: 미역국, 흑미잡곡밥, 명란젓, 열무김치
1일차 식사2: 코다리찜, 흑미잡곡밥, 열무김치
1일차 식사3: 짜장면, 짬뽕, 탕수육, 군만두
1일차 간식: 흑임자 인절미, 무화과, 포도, 꼬북칩, 포테토칩, 레몬수 2리터
1일차 감상: 격리란, 사실 놀고 먹는 좋은 것이다.